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오늘 묵상하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장 1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에 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2절과 3절 말씀,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요셉을 판 형들에게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셔서 보복하시고, 노예상이 모래폭풍을 맞아 모든 것을 잃고 요셉이 풀려나 아버지의 품에 돌아가 채색 옷을 입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형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감’이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노예로 팔리는 뜻이 있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일까요? 분명 요셉이 형통하였고, 주인 보디발이 보기에도 형통한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형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동행 1, 2, 오늘로서 3를 하는 우리는 형통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형통한 삶이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사전적 의미처럼 우리가 뜻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하는 삶이 바로 형통의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우리가 형통하는 것은 5절 말씀처럼,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즉,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합니다. 형통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물질적인 복이 차고 넘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까지도 풍족해지는 것을 꿈꾸며 형통을 말합니다.
하지만, 형통의 삶을 사는 요셉은 지금 노예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주인이 잘해줘도 노예는 노예입니다. 형들의 손에 팔려진 비참한 신세, 매일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노동을 해야 하는 노예가 바로 요셉의 상황입니다. 따라서 형통의 삶이란 하나님과의 동행이 늘 이루어지는 삶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에,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지도 않았음에도, 우리가 거하는 곳도 복을 받고, 물질적인 풍요도 덤으로 받는 삶이 형통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의 삶을 살았던 요셉처럼,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형통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을 보면,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고, 고단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경험도 할 수 없는 형들에게 팔리는 상황, 좌절해야 마땅한 큰 일이 다가와도 요셉의 애통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도, 요셉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39장을 넘어서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는 그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어렵고, 삶이 고단해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계심을 알기에 전혀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죄도 넉넉하게 이깁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지금처럼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한번 감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냥 눈감고 따르는 것이 몸은 훨씬 편해지는 일입니다. 감히 노예가 주인마님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거절이 자신에게 분명 불이익을 줄 것이 당연한데 그는 모든 유혹에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9절 말씀처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자신의 몸의 주인인 보디발 때문에 죄의 유혹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당연히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이틀에 거쳐 하나님과의 동행을 무시했던 요셉의 형들의 삶과 유다와 그 가정의 삶은 죄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매 순간 다가오는 유혹을 전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 또 지어도 아무런 거림낌조차 없었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을 인정하면, 그 어떤 죄,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죄까지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6절 말씀에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했다고 하는데, 보디발이 본 요셉의 형통한 모습이 무엇이었을까요? 돈을 잘 불리고, 장사의 수완이 좋은 것을 의미하였을까요? 노예임에도 거룩하고 순전하고 거짓이 없는 삶,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고 손해보는 듯 살아가도,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본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주인이 노예를 보며 형통을 말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런 소유도 가질 수 없고, 가족에게 배신당하여 팔려온 불쌍한 인생… 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 하루를 열심으로 살아가고, 기쁨과 행복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보며 눈여겨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지만, 그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요셉과 함께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느끼고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21절 말씀을 보면,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요셉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진정한 형통은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지만, 여기에서도 그 어떤 원망이나 애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감옥도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그 곳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계획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죄수의 생활이 간수장에게 어떻게 좋게 보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열심으로 잘한다 한들, 간수장의 마음에 어떻게 좋게 보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23절 말씀,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간수장도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셉이 범사에 형통한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우리의 뜻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만 이렇게 안되는지, 나만 이렇게 슬프고,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육신의 질병이, 마음의 상처가, 인생의 고통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고, 크고 작은 죄의 유혹이 계속해서 나와 가정을 흔들 때에, 우리가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말씀과 기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귀와 마음에 들려지며, 기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형통한 하루를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제는 우리의 가족들도 보고, 우리가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되고,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놀라운 복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임하게 되기를 다시한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도 형통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며 승리하세요!!